잊힌 평택의 함성, 서대문 형무소에 새겨진 ‘수도군’ 후예의 기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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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7주년 3.1절 맞이, 미발굴 독립운동가

평택의 영웅 이승익 지사를 기리며
[특집] [평택매일뉴스] 1919년 4월, 안성과 평택의 접경지는 대한독립만세의 열기로 가득 찼다. 그 중심에는 평택군 송탄면 모곡리 출신의 한 청년이 있었다. 전주 이씨 수도군(조선 정조의 7남)의 19대 후손이자, 지역의 기개 높은 선비였던 이승익(李承翼, 1886~1942) 지사다.

■ “평택의 아들, 안성의 불길이 되다”
1886년 평택 모곡리에서 태어난 이승익 지사(이명 이공삼)는 평소 향리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던 평범한 농민이었으나, 나라를 되찾겠다는 마음 만큼은 누구보다 강렬했다. 1919년 3.1 운동의 불씨가 전국으로 퍼지자, 그는 4월 1일 안성군 양성면과 원곡면 일대에서 일어난 격렬한 만세 시위에 몸을 던졌다.
당시 시위대는 양성면사무소와 우편소 등을 습격하며 일제의 통치 기관을 무력화시켰다. 이 지사는 이 과정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하다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다. 1920년 경성고등법원에서 징역 3년을, 이듬해 경성복심법원에서 최종 징역 2년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혹독한 옥고를 치렀다.

2년여의 수감 생활 끝에 고향 평택으로 돌아왔지만 고문과 투옥의 후유증은 깊었으며 이지사는 평택 칠원리 자택에서 병석에 누워 투병하면서도 끝내 해방을 염려 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광복을 3냔 앞둔 1942년 4월17일 그토록 바라던 독립된 나라의 공기를 마시지 못한체 세상을 떠났다
그의 공훈은 사후 1980년 광복정\ㄹ을 맞아 대통령 표창이 추서되었고 이에 공식 인정받았다 1984년 국가 지원으로 묘비가 세워 졌으나 현재는 묘역 이장과 함께 연고지인 평택을 떠나 여주오 옮겨져 지역민들 사이에는 아쉬움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 미 발굴 독립 운동가와 친일 청산 우리게게 남겨진 숙제
제107주년 3.1절을 맞는 오늘날 이승익 지사의 사례는 우리에게 시사점을 준다 평택과 안성을 잇는 뜨거운 역사가 여전히 지역사회의 깊은 관심권 밖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특히 아직 서훈을 받지 못한 미발굴 독립운동가들의 기록이 산재해 있고 과거 친일 잔재 청산 문제가 여전히 갈등의 불씨로 남아있는 현실에서 유공자 후손들의 상실감은 더욱 깊어 질것으로 보여진다

■ 평택의 위인 다시 고향의 품으로 기억해야
이승익 지사가 평택 모곡리 선영에 묻혔던 그 뜻을 기려야 한다는 생각을 해본다 단순이 과거의 인물로 치부할 것이 아니라 평택의 정신을 세우는 지역 위인 찾기 운돈의 일환으로 그의 생애를 제조명하고 선양하는 작업이 시급하다
조선의 왕족 후손이라는 명예보다 대한의 독립군이라는 이름으로 살고자 했던 이승익 지사 그의 헌신이 있었기에 오늘날 평택의 평화기 있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한상호ptmnew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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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메모]이 기사는 역사적 기록을 바탕으로 작성 되었으며 우리 주변에 독립운동가가 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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